임기택 IMO 명예사무총장은 퇴임 후에도 국내외를 오가며 해양 정책을 조언한다. 그는 “겸손해야 설득과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남강호 기자

“위기는 늘 기회였다. 바다를 둘러싼 미·중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향후 10년은 대한민국이 해양 산업의 메카로 도약할 골든타임이다.”

대통령이 파면된 지난 4일, 임기택 전 IMO(국제해사기구) 사무총장은 “정치적 소용돌이로 잠시 흔들렸으나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유엔 전문기구인 IMO(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는 전 세계 해운 산업의 국제 협약을 만들고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일등항해사에서 이른바 ‘해양 대통령’으로 불리는 IMO 사무총장직에 한국인 최초로 선출돼 8년간 연임한 임기택은, “지금은 서로를 바다처럼 품어줄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한 때”라고 했다.

◇ 조정과 설득의 리더십

-IMF는 알아도 IMO는 생소하다.

“유엔 산하 15개 전문기구 중 하나로 런던에 본부가 있다. 전 세계 선박의 안전 기준과 항로 규칙, 인명 구조, 피해 보상 등 50개가 넘는 해운 관련 국제 협약을 만들고 관리하며 지속 가능한 해양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IMO 사무총장을 ‘바다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던데.

“상징일 뿐 특별한 권한은 없다. 다만 회원 175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니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인 건 맞다.”

-8년을 연임해 화제였다.

“회원국 중엔 강대국도 있고 약소국도 있지만 차별 없이 공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관점 차이를 좁히고 서로 연결하는 기능을 가장 중점적으로 했다.”

-기후변화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민감한 이슈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국가별 친소 관계, 지정학적 관계에 따라 보통 7~8개 그룹이 다른 의견을 갖는다. 그룹을 대표하는 10여 국 리더들과 함께 집단 리더십을 실험했다. 이들이 먼저 토론한 뒤 자기 그룹의 국가들을 설득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해운 산업계에 기후변화 대응 전략을 수립한 것이 최대 업적이라 들었다.

“2015년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된 후 해운 산업 분야에서 만장일치로 합의된 첫 케이스였다. 선박의 탈탄소화, 탄소세 등 첨예한 쟁점이 많았지만 175국이 합의해 세계가 놀랐다.”

-조정과 설득의 노력이 어마어마했겠다.

“한국에서 살아남으면 유엔에서도 살아남는다(웃음). 한국의 복잡한 정치 환경과 역학 관계를 관찰하면서 배운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됐다.”

대한민국이 조선업 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든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미중 해양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 조선업에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트럼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 트럼프의 이유 있는 손짓

-미국과 중국의 해양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미·중의 긴장과 대립은 우리에겐 기회다. 조선·항만·해운 분야에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을 벌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의 지정학적 긴장이 계속될 향후 10년은 그래서 골든타임이다.”

-일본도 막강한 해양국인데.

“일본은 90년대 초반까지 세계 상선대의 20%, 조선 능력의 30%를 가진 강국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해기사 양성에 실패하면서 패권을 잃어갔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 사카모토 료마가 관방장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무대신으로 설정된 작품을 봤다. 과거 영웅들이 그리울 만큼 일본 리더십이 원활히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은 어쩌다 바다에서도 중국의 위협을 받게 됐나?

“제2차 대전 때 바다의 모든 수송로를 장악했던 미국은 자기를 넘볼 수 있는 나라가 없을 거라 자만했다. 세계 최대 수입국인 미국에 전 세계 배들이 물류를 수송하니 해운·상선을 발전시킬 필요성도 못 느꼈다. 1년에 수백 척씩 만들던 조선소가 문을 닫고 해운 인력이 급감했다. 중국은 달랐다.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을 거쳐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해양 팽창 정책을 펼쳤다. 현재 중국의 군함은 380척으로 이미 미국(295척)을 추월했다. 1000톤 이상 국적 상선도 중국은 7000척인 데 비해 미국은 80척에 불과하다.”

-자국 상선(商船)의 규모가 안보에 왜 중요한가?

“유사시 전략 물자 수송 능력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한다. 상선을 ‘제4군’이라 부르는 이유다. 코로나 시기 전 세계 수송망이 마비된 데 이어 곳곳에서 국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자국 상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트럼프가 한국에 조선업 협력을 요청한 건가?

“작년 12월 미국 의원 4명이 초당적으로 해운조선부활법안(Ships for America Act)을 발의했다. 해운 산업을 재건하고 해기사 인력을 증대해 전략 물자의 수송망을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외국 조선소에서도 미국 군함을 지을 수 있도록 적극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가 조선업 1위인 한국에 SOS를 친 배경이다.”

경남 창원특례시 진해구에 자리한 케이조선 조선소 전경/ 조선일보DB

◇ 배를 지어도 운항할 선장이 없다?

-미국 군함을 완전체로 건조하는 게 아니라 수리·정비(MRO) 하는 수준에 머물러 돈도 못 벌고 배제될 거란 시각도 있더라.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배의 품질, 기술, 경제성 모두에서 우위를 점하면 미국은 물론 유럽 국가들도 한국과 협업을 확대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해운·조선·항만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세계 5위 해운국이다. 전 세계 선대의 4.2%를 차지한다. 특히 LNG 수송선 등 IMO 기후변화 전략에 맞는 새로운 선박의 수요로 조선업은 앞으로 20년 이상 호황을 맞을 것이다. 문제는 해기사(海技士)다. 항해사와 기관사를 포괄하는 해기사의 숫자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

-배를 만들어도 운항할 사람이 없다는 뜻인가?

“보통 상선 한 척에 해기사 10명이 필요하다. 한국은 상선 1200척을 보유하고 있어 최소 1만2000명의 해기사가 필요한데, 현재 승선이 가능한 해기사는 6000여 명뿐이다.”

-외국인 해기사를 고용할 수는 없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국마다 자국선과 자국 해기사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은 해기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연방상선사관학교(킹스 포인트)와 6개 주립 해양대학에 대대적으로 입학 정원을 늘리는 계획을 세웠다. 중국은 대련 해사대와 상해 해사대 등 10여 개에 달하는 해양대학에서 매년 수천 명의 해기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해양대와 목포해양대가 있는데.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해기사는 전시 제4군으로 육성돼야 한다. 내가 해양대학다닐 때만 해도 ROTC 군사훈련을 필수로 받았다. 해기사는 하이테크로도 무장해야 한다. 미래 선박이 자율운항·탈탄소·빅데이터 등 신기술로 급속히 진화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해양대학의 교육 시설과 장비는 턱없이 부실하고 낙후돼 있다. 혁신을 위해 해양대 두 곳이 연합해 정부의 ‘글로컬대학30’ 프로젝트에 지원했는데 연거푸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양 산업에 대한 교육 당국의 인식 부족이 참으로 아쉽다.”

1일 서울 여의도 해운빌딩에서 임기택 IMO(국제해사기구) 전 사무총장이 대형 벌크선 캄사르막스 모형을 들고 활짝 웃었다. 2025.04.01 /남강호 기자

◇ 마산항에서 헤엄치던 소년

-‘이순신의 나라’인데도 우리가 해양국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문(文)을 숭상하는 유교 문화 때문이다. 서울에 집중된 엘리트와 인프라도 바다를 멀리 느끼게 한다. 지금도 ‘뱃놈’이란 멸칭을 쓰지 않나(웃음). 바다를 지배했던 영국은 상선대를 왕립상선해군(Royal Merchant Navy)이라 부른다.”

-바다를 알았던 두 지도자는 이승만과 박정희라고 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대륙 세력에서 해양 세력으로 바꿔 놓은 대통령이다. 해양주권을 선포하고 독도를 지켜냈다. 박정희는 조선 강국의 기반을 닦았다. 세계적 조선 기술자였던 신동식을 미국에서 데려와 정주영으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했다. 현재 우리에게 그런 리더십이 있나? 남중국해에 이어 북극항로 개척이 전 세계 이슈로 떠올랐지만 우리는 어떤 전략을 세우고 있나? 머뭇거리기만 하면 중국에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딥시크의 충격이 크긴 했다.

“미국을 움직이는 게 돈이라면, 중국은 굴기에 의한 애국으로 움직인다. 얼마 전 어느 중국 대학 부총장이 내게 초빙교수를 제안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아침에 와서 그날 밤에 가더라. 일해야 한다면서. 전투 태세가 느껴졌다(웃음).”

-그래도 트럼프의 미국을 넘기는 어렵지 않을까.

“요즘 중국은 소프트 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중남미와 손잡은 데 이어, 관세 전쟁으로 미국에 반감을 갖게 된 유럽 국가들까지 파고들고 있다. EU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공포심, 거부감을 걷어낸 데에는 트럼프의 공이 크다(웃음).”

-트럼프는 어떤 사람인가?

“국제 무대에서 내가 관찰한 트럼프는 똑똑하고 생산적이며 실천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상대는 인정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제왕의 성정을 지닌 사람은 굽신거리는 이들을 업신여기고, 성냥개비 하나라도 빳빳이 세우고 오는 사람에겐 움찔한다. 트럼프는 승부사의 기질로 대응해야 한다.”

-현재 대선 후보군 중에 그런 자질을 갖춘 인물이 보이나?

“국내 정치인은 내가 잘 몰라서 말씀드리기 어렵다(웃음).”

-마산 바닷가에서 자랐더라.

“무역선 드나드는 마산항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한국해양대에 진학했다.

“당시엔 SKY 대학보다 경쟁이 치열했다(웃음).”

-바다가 두렵지 않나.

“해군 중위 시절 고속정이 하얀 물줄기를 뿜으며 바다를 가를 때, 항해사 시절 태평양에서 만난 집채만한 파도가 수만 톤 무역선의 뱃머리를 때릴 때 어마어마한 희열을 느꼈다.”

-직업병 같은 게 있다면?

“앞이 콱 막힌 아파트에선 못 산다. 무조건 뚫려야 한다(웃음).”

-스무 살 청년들에게.

“의대 말고 바다로 가라! 바다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임기택

1956년 경남 마산 출생. 마산고,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와 스웨덴 세계해사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양대 졸업 후 6년간 항해사로 일하다 인천해운항만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해양수산부 주영국 대사관 공사참사관, 국토해양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을 거쳐 부산항만공사 사장을 지낸 뒤 2016년부터 8년간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을 역임했다.